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국-멕시코 전쟁 (문단 편집) === 멕시코의 등장과 텍사스 문제 === 독립과 동시에 유카탄 반도 이북의 모든 [[스페인]] 식민지의 영유권을 획득하여 지배하고 있던 멕시코로서는 동부 지역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본래 [[선벨트]] 중부와 서부 및 멕시코 북부의 고원 지대는 건조지대라서 대규모의 관개 시설 없이는 제대로 농사를 짓고 인구를 부양하기 힘든 지역이었고 [[누에바에스파냐]] 시절 스페인 식민 당국은 어차피 아메리카 각지에 꿀땅도 남아도는데 굳이 사막 지역을 개간할 이유는 없다는 이유로 해당 지역의 개발에 소홀하였다. 19세기 초반 캘리포니아와 그 주변 방대한 영역을 포괄하던 알타칼리포르니아(Alta California) 준주의 인구는 겨우 85,000여 명에 불과하였을 정도였다. 테하스(Texas) 준주의 경우 코만치족과의 충돌 문제로 스페인어 사용 인구는 겨우 7,000여 명에 불과하였고 이마저도 대부분 루이지애나 인접 지역에 밀집해 있었다. 1820년, 즉 '''멕시코가 독립하기 불과 1년 전'''에 이 지역의 공식적 통치국가였던 스페인 정부로부터 텍사스 일부 지역을 불하받은 미국인 이민자들이 텍사스에 들어와서 정착촌을 건설한 상태였던 것이다. 신생국가 [[멕시코]]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이민자들과 협상 끝에 [[스페인어]]를 쓰고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조건으로 불하권을 인정받았으며 이후 멕시코의 정치불안을 틈을 타서 미국인 이민자들은 텍사스로 빠른 속도로 이주를 하기 시작하여 인구가 늘어나게 된다. 결국, 필연적으로 조건 따위는 씹어먹은 [[미국계 멕시코인|미국인 이민자들]]과 멕시코계 주민들, 멕시코 정부와의 충돌이 잦아지면서 미국과 멕시코 양국은 모두 이 지역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미국은 텍사스를 3천만 달러에 구매하고자 했으나, 멕시코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는 동안 멕시코의 중앙정치 혼란은 가속화되었고 그 틈을 타서 텍사스의 미국인 이주민 세력은 계속되는 이주로 강해졌는데[* 특히 [[독일계 멕시코인|독일계 이주민]]들에게 텍사스가 새로 농장을 건설하기 딱 좋은 땅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독일에서 미국으로 유입된 이주민들이 마차를 타고 텍사스에 대규모 정착하기 시작했다.] 텍사스 인구의 90%가 미국인 이주민들이었다. 중앙정치의 혼란을 잠재운 멕시코 대통령 [[산타 안나]]는 텍사스 이주민 세력에 [[최후통첩]]을 내리면서 무장한 미국 이주민들은 무장해제 후 텍사스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주민 세력은 이에 반발하여 대반란을 일으켰고 [[텍사스 공화국]]을 세웠다. [[산타 안나]]가 직접 지휘한 멕시코군은 알라모[* 미국사의 [[테르모필레 전투]]라고 할 수 있는 전투였다. 그 유명한 [[데이비드 크로켓]]을 포함한 개척민들로 구성된 186명의 민병대가 성당을 개조해 만든 알라모 요새에서 10배 이상이나 많은 3천명의 멕시코군을 상대로 며칠 동안 분전하다가 모두 전멸했다. 미국에서는 관련 영화도 여러 차례 나올 정도로 유명한 전투. 이스라엘의 마사다 요새 전투처럼 미국에서 죽기 살기로 싸운다는 대명사가 되었는데, 덕분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클라이맥스 전투에서도 밀러 대위가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는 최후 방어 거점을 '알라모 요새'라고 부른다. 제프 롱의 소설 디센트에서는 헤이들들에게 포위된 용병들 중 한명이 알라모처럼 싸우자! 라고 외치는데 옆에 있는 멕시코계 용병이 바로 좆까! 라고 외치는게 압권(...).][* 이 전투를 그린 영화로는 알라모(1960년, 2004년 작)와 데이빗 크로켓이 있다.]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진격했으나 정작 산 하신토([[샌 재신토]]) 전투에서 텍사스 반군에게 대패하고 포로로 잡혀서 텍사스의 독립을 인정하는 조약을 맺고 풀려났다. 그러나 산타 안나가 잡혀 있던 사이 멕시코 정부는 그를 대통령직에서 파면시킨 상태여서 산타 안나의 조약엔 효력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대통령에 당선이 된 산타 안나는 이를 이용하여 텍사스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다시 군대를 보내 제압하려 했으며 텍사스 측은 이에 저항하면서 양측의 산발적 충돌이 계속됐다. 신생 [[텍사스 공화국]] 내부에서 독립파와 연방합류파의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연방합류파가 승리하여 텍사스는 [[미국]]의 주로 합류하기로 하고 미국 역시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문제가 커졌다. 한마디로 멕시코 입장에서는 미국이 제멋대로 반란군들이 강점한 자국의 영토를 가져가 버린 셈이었고 미국은 "이웃의 독립국가가 요청을 해서 이를 받아들였을 뿐이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열받은 멕시코는 미국과의 [[국교단절|외교관계를 단절했으나]][* 나중에 멕시코가 미국에게 패배하면서 미국의 강요로 외교관계가 회복되었다.] 당시 미국은 대외정책에서 내부적으로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텍사스 공화국의 전쟁 당시에도 미국은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들이 겹치면서 당시의 미국 대통령 [[제임스 포크]]는 팽창론자로서 공공연히 태평양 출구인 [[캘리포니아]]까지 확보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파였다. 1846년 4월 25일, 양군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하고 미군 16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게 되자 미국은 이를 빌미로 멕시코에 전쟁을 선포했다. 사실 멕시코는 미국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아 최대한 충돌을 피했으나 미군이 전쟁선포 떡밥을 만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국경에서 집적대면서 충돌을 일부러 일으켰다. 이 충돌이 멕시코 국경 너머에서 벌어진지라 반전주의파였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멕시코에 선전포고를 하러온 포크 대통령에게 충돌이 벌어진 장소를 정확히 지도에 찍으라고 했지만 이에 불응하자 반전주의파는 협상을 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반전주의파의 힘이 너무 약하고 미국 내에서는 만장일치로 멕시코에 대한 전쟁을 지지하면서 선전포고가 이루어지고 전쟁이 시작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